'티켓다방 팔려갈 뻔' 사채피해 아가씨, 경찰에 부탁해 구해내면서 인생관 바뀌어
남들 마다하는 힘든 일만 따라다니며 위기 해결, 정책적 보강안 제시까지 '소방수'
성당 다니며 '칼잡이' 운명 반성...'검은 돈 안 받고 외압도 철저 배척' 이력이 자랑
![[사진=강경상고 제27대 총동창회]](https://cdn.financialpost.co.kr/news/photo/202511/238683_278326_1437.jpg)
한국은행 입행 후 옛 은행감독원, 옛 신용관리기금 등 굵직한 직장만 두루 거친 끝에 금융감독원 선임국장까지 오른 남자가 있다. 조성목 FPSB코리아 부회장, 그는 금감원 출신이지만 친정에 쓴소리를 마다치 않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금융정책에 대한 비판은 물론 정책집행 현장의 무리수에 대해서도 핀셋 비판을 아끼지 않지만, 반면 서민금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성격이 180도 바뀐다. 애정과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차 오르는 것이다. 민간조직인 서민금융연구원을 세워 원장을 지냈고, 이후 서민금융연구원 이사장이 됐다. 이런 서민금융에 대한 애정, 잘못된 금융 구조에 피해를 입는 이들에 대한 연민은 금감원 시절 각종 현업에서 피부로 느낀 문제점에 대한 각성에 뿌리를 둔다.
그의 또다른 세번째 면모는 바로 모교, 동문에 대한 사랑이다. 1961년 5월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인근 지역에서 가장 좋고 경쟁이 치열하다는 강경상고에 들어가 좋은 스승과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고 회상한다. 강경상고 총동문회에서 회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 자신이 쓴 책 두 권(이 책도 학교 후배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일감을 달라고 은근히 독촉을 해서 펴내게 한 것이라고 한다)에 대한 독후감을 받고 출판사에서 선정한 순위에 따라 지급을 한다는 설명이다.
경기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인연은 이후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연세대 경제대학원 졸업, 서울대 경제연구소 세계경제최고전략과정 수료 등 학업을 잇는 과정에서 멀리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경기대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금감원 이력은 부친 '조 이장'에게서 물려받은 부정을 마다하고 민생을 위한 판단만 하자는 올곧은 정신으로 하나로 꿸 수 있다. 부친은 금년 88세로 초등학교 4학년까지만 다닌 분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시면서 집이 기울어 학교를 나가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일을 할 수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홀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을 건사하며 동네에서 신임을 얻고, 이장을 맡으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라 마을에 내려오는 각종 지원을 오직 공평무사하게 썼다고 한다. 지붕 근대화, 담장이나 죽방 사업 등을 위해 슬레이트나 시멘트 등이 많이 중앙에서 지원됐고 면장이나 이장 등도 일부 '재량'을 부릴 수 있는 면이 있었다는 게 당시를 회상하는 많은 이들의 중론이다. 그래서 부친이지만 존경스러웠다는 것이 조 부회장의 기억이다.
사채 피해에 그가 심각함을 느낀 것은 2001년 4월 2일 사채피해신고센터에 부임하면서다.
"점심을 먹고 막 들어와서 책상에 앉았는데, 전화가 와요. 직원들이 없으니 내가 그냥 당겨받았지요. 그런데 사채업자에게 단돈 200만원을 빌렸다가 삽시간에 불어나는 이자로 그야말로 먼 곳의 티켓다방에 팔려가게 생긴 젊은 여성이에요. 짐 꾸리고 몇 시까지 집 앞으로 나와 있으라고 협박을 받아 지금 가방을 챙기다가 어디서 본 금감원이라는 기관 이름하고 센터 명칭하고 번호로 전화를 건 거래요."
그는 "그야말로 살이 부들부들 떨리더라"라면서 잠시 차를 마시며 되살아난 그때 그 감정을 식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전에 업무 관계로 알고 지내던 당시 서초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야말로 떼를 썼다. "공문은 나중에 만들어 줄 것이고 문제 생기면 어떻게든 책임을 질 테니 형사들 좀 보내서 그 사채 업자하고 조직폭력배들 좀 잡아 달라"고 우겨서 결국 여성을 구출해 냈다는 그의 무용담은 얼마 전 그의 금감원 후배들이 경찰 광역수사대와 협력해 만든 스토리와도 닮았다. 이번에 금감원-경찰 협력으로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을 쓸어버린 일과 그의 앞선 일화는 묘한 데자뷔를 느끼게 한다(본지 11월 6일자 <금감원·서울광수대 '맞손'...'캄보디아 거점' 투자사기 범죄단 50여명 '일망타진'> 기사 참조).
"저축은행 사태가 터졌을 때에는 그걸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매일 같이 셔터가 내려진 저축은행 본점 앞에 찾아와 우는 피해자들을 보면서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와 저축은행 사태는 이미 그 전에 다른 일을 처리하면서 얽혀 있었던 '운명'이었다. IMF 구제금융 도입을 겪으면서 당시 정부는 각종 문제를 처리하느라 골몰했다. 떨어진 일을 따라잡고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때였지만, 그와 금감원 동료 및 후배들은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헌재씨 그리고 김석동씨가 그의 멘토였다. 이헌재 전 금감원장(그는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도 겸했다. 이 기구는 현재 금융위원회로 이름이 변경됐다)은 옛 재무부 관료였지만 '율산그룹 처리'의 후폭풍으로 '야인' 생활을 길게 했다. 이후 IMF 사태가 오면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 등을 맡으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대우그룹 해체' 등 대형 수술을 통해 우리 경제 부활을 위해 뛰었으나 호불호가 심히 갈리는 인물이다.
김석동씨는 재정경제부 차관보를 거쳐 구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과 금융위원회로 바뀐 후 위원장까지 올라 각종 문제를 수습한 '특급 소방수', 'DJ 정부의 소방수'로 역할을 맡았다.
금융위(옛 금감위)와 금감원 수장이 겸직을 하거나 긴밀히 경제 위기 수습을 위해 지금보다 훨씬 밀착해 협력하던 따의 일이니 당연히 금감원에서 '온갖 궂은 일만 떠맡은 바보 조성목'으로서는 이들의 멘토링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었던 직속 상황이 자주 연출됐다고 당시 금감원 사정을 아는 이들은 설명한다.
![[사진=강경상고 제27대 총동창회]](https://cdn.financialpost.co.kr/news/photo/202511/238683_278325_1214.jpg)
그는 저축은행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이미 잘못 발을 들일 기회와 유혹이 있었지만, 그때 단호히 마다했기에 나중에 저축은행 사태가 터졌을 때 깨끗한 무관여 인재로 분류돼 '막내 소방수 역할'로 차출돼 업무를 집중 처리할 수 있었고, 이후 각종 요직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올랐다고 설명했다.
"실세 A 당시 의원의 부하 그러니까 보좌진 쪽, 그리고 그쪽을 통한 몇 군데서 은근히 유혹이 있었어요. 어디어디를 좀 봐줄 방법을 찾아달라, 아니면 담당자와 이야기해서 잘 처리하도록 해 달라, 그러면 실장을 시켜 준다, 국장 승진 갈 길을 보장한다...하지만 마다했습니다."
이후 저축은행 사태에 많은 공직자들이 연루돼 곤욕을 치렀지만, 그는 "공짜 술 한 번 안 얻어먹고 공짜 골프 한 번 안 친 인물"이라는 주변의 평판에 오히려 문제 수습의 대책반장 발탁 기회를 얻었다.
"IMF 터질 때 정리한 것부터 시작해서 저축은행 사태 등등 다 합치면 저축은행을 제가 133개나 수술했더군요. 어떤 이들은 제가 고발장을 직접 쓰는(검찰에 내는) 악역을 맡았지만 원망 한 마디 안 들었습니다."
금감원의 비제도금융조사팀장, 서민금융지원실장 등에 이어 임원회의에까지 참석하는 서열 12위 선임국장을 지낸 그는 두 아들(39세, 35세)이 어려웠던 시절 호방한 조언을 해준 것을 늘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학교 다니던 애들이었는데 '아버지, 옳은 일 하다 잘리게 되면 그냥 그만 두세요. 저희가 아르바이트라도 할게요'라고 합디다. 그래서 늘 어려운 일, 힘든 업무 맡을 때면 사표를 품에 안고 다니면서 피해자들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평생 남들 안 하는 일, 험한 일 그러니까 속칭 '칼잡이'만 한 것 같아 마음이 힘들어서, 언젠가부터 성당에 다녔다"는 그는 아들들을 생각하면 더 잘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고도 토로한다. "서울대, 고려대 지들 힘으로 나왔지만 유학까지는 못 보내줬다"며 가족 이야기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그는 이제 금융 문제사범 단속의 험한 길을 내려와 한결 편해진 표정을 짓는다. 금감원 현업 당시 그렇게 좋아하던 서민금융을 마음껏 연구하고,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역할을 하며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