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이미지 [픽셀스 제공]
넷플릭스 이미지 [픽셀스 제공]

요즘 우리나라는 정치적 이슈가 모든 걸 삼켜 버리는 블랙홀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사이에 법치주의가 세상의 모든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헌법과 법률 뉴스로 머리가 찌근찌근거리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와중에 최근 유독 눈길을 주는 뉴스가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 1인당 국민총소득(GNI)가 3만불 시대에 11년째 횡보하고 있다는 소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2014년 3만불에 진입하여 2024년 3만6천불 수준으로 소폭의 상승이 있었지만, 11년간 4만불대로 진입을 하지 못하는 박스권에 갖혀있는 형국이다. 한국은행의 올해 경제성장율 전망치가 1.5%, 내년에는 1.8%임을 감안해보면 향후 2030년 이전에 4만불 진입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한국은행 총재가 언급한 산업 구조 조정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산업구조 조정이 새롭게 등장한 화두는 아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산업들이 성장해야 경제 성장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필자의 오래된 생각은 문화산업이다. 과거 70년대 영국이 대처리즘으로 산업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국민소득을 끌어올리기 위해 영어라는 언어를 전세계로 수출하고, 국내 리그로 머물던 축구를 글로벌 시장으로 확대시키고, 패션 등 각종 제품의 디자인 산업에서 선두를 차지하면서 쇠락해가던 영국을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광범위한 문화산업에서도 음악·영화·드라마·예능·다큐·스포츠 등 미디어·콘텐츠 산업이 대한민국의 4만불을 이끌 주역이 될 것이다. 수백 조원의 글로벌 시장 관점에서 최근 국제 경쟁력이 입증된 대표적인 분야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K-Pop으로 대표되는 음악 산업은 글로벌 경쟁력이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005년 즈음 주식시장에 상장된 SM엔터테인먼트는 시가총액 300억원 수준으로 그야말로 별 볼일 없었다. 그 당시 한국의 대형 디바로 인정받던 보아가 일본 도쿄돔에서 공연하면서 팬덤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회사 차원에서는 수익을 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10년 뒤 2015년 즈음에는 SM엔터테인먼트는 시가총액 1조원으로 30배 이상 성장하고 나아가 하이브가 배출한 BTS라는 걸출한 아이돌 그룹은 글로벌 시장에서 우뚝 서게 되면서 하이브 시가총액은 10조원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음악산업에서 성공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쉬운 부문이 있다. 바로 영화·드라마·예능으로 대변되는 영상산업에서는 이렇다 할 성공 스토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기업 계열사인 CJ E&M과 스튜디오 드래곤이 시총 1조원을 넘어서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500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넷플릭스 시가총액을 쳐다보면 한숨만 나올 지경이다. 2020년 전후 코로나 시대에 진입하기 전에는 장미빛 전망이었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 등 우리 국민들을 흥분시키는 쾌거를 듣고 희망찬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펜데믹이 끝나고 냉정한 현실로 돌아와 보니 대한민국 영상산업은 날개없는 추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게 현실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넷플릭스라는 딜레마에 막혀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상륙하여 킹덤으로 센세이녈을 일으킬 때 기우라고 여겼던 콘텐츠 산업 생태계가 서서히 멍들어 가고 있다. 국내 대기업 및 지상파로 대변되는 미디어 기업들도 수익이 급감하면서 공존의 궤를 같이하는 제작사 등 중소 미디어 및 콘텐츠 기업들은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넷플릭스에 대항하는 티빙과 웨이브, 왓차 등 국내 OTT 플랫폼들은 고사 직전이다. 현금 창출 능력이 그나마 우수한 통신 3사가 구원투수로 투입된 지 오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역부족이다. 년간 수십 조 단위의 제작비를 쏟아붓는 넷플릭스에게는 조족지혈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넷플릭스에서 운좋게 일감을 찾은 극소수의 제작사만이 연명하는 수준의 마진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산업 발전의 필요조건인 생태계가 무너졌다. 안그래도 흥망성쇄가 심한 산업에서 몇 몇 배우나 감독·작가들이 가문의 영광인 수준의 성공을 거둔 수준에서 유명세를 탈 뿐이지 대한민국 국민소득을 몇 천불 끌어올릴 산업 성장을 기대하기는 언감생심이다.

넷플릭스라는 세계 최대 미디어 기업은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 시장은 그야말로 여러가지 대안중 하나일 뿐이다. 시쳇말로 원 오브 뎀(one-of-them)이다. 넷플릭스 투자금이 국내 생태계로 흘러들어 선순환 구조를 이루면서 국내 콘텐츠 시장을 활성화시켜 영화·드라마·예능 분야에서 제2의 봉준호·황동혁 감독을 꿈꾸는 우리나라 젊은 인재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는 힘들다. 치고 빠지기가 행행한 가운데 단물만 쏙 빼먹는 넷플릭스의 선택을 기다리는 줄서기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냉철한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 하수인으로는 전락한 상황에서는 자생형 글로벌 콘텐츠·미디어 기업이 싹을 틔울 리 만무하다.

이제는 정부가 나설 차례다. 1960년대 포항제철이 자동차·조선업 등 대한민국 제조업의 기틀을 세웠듯이 넷플릭스에 대항하는 한국형 넷플릭스가 우뚝 서야지 국내 콘텐츠·미디어 기업들이 비빌 언덕이 만들어진다. 다들 무모하다고 한다. 하지만 포항제철이 그랬듯이 한국형 넷플릭스를 만들어 최소한 아시아 시장에서는 1등 아니 2등이라도 할 수 있는 OTT 플랫폼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지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된다. 주식시장에서는 투자처를 찾지 못해서 서학개미로 몰려드는 돈이 수십 조원이며, 1천 조원이 넘는 국민연금 펀드는 전세계 투자처를 찾고 헤매고 있고, 수백 조원의 오일머니가 한국 시장을 노크를 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비전과 전략이 있으면 자본은 따라 온다. 자본을 유치할 인재도 이미 차고 넘친다. 결국 아시아 넘버 원 OTT를 꿈꾸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제시하면 인재와 자본이 밀물처럼 몰려올 것이다.

하루빨리 정치가 제자리를 찾고 미래를 고민하는 건전한 논의가 학수고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최영석 파이낸셜포스트 위원

전 미디어캔 대표

전 KT 미디어정책 상무

전 CJ 기획팀 상무

전 IHQ 부사장 CFO

전 대통령실 홍보수석실 행정관

전 삼성증권 애널리스트

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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