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재계-금융권 인사들의 흔적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어찌 저런 청출어람 같은 후손이 나타났을까 싶은 오너 일가도 있고, 호부견자라는 표현마저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또한 기사를 쓰는 일을 계속 하다 보면 우연히 운좋게도 단독 기사를 쓸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평생 한 번도 못할 단독을 쓰고도 속상하고 마음이 아픈 경우가 있다. 후자의 오너 일가나 그들 때문에 희생당하는 이들의 사연을 다르는 경우다. 약자의 눈을 도려내는 것 같은 이야기, 예전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은 바로 대신증권이다.
MBC의 창사 30주년 특별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일본군에 입대했던 최대치(최재성 분)가 버마 임팔 작전에서 살아남아 중국 국민당군에 구출되고, 이후 팔로군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에 빠져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를 괴롭히는 오오에(장항선 분)라는 이름의 오장이 있는데, 그는 군국주의의 화신 같은 일물로 나온다. 특히 조선인들을 학대하는 게 자주 브라운관에 비춰졌다.
무리한 작전 끝에 낙오병 몇만 남은 상황에서도 그는 진격만을 외친다. 먹을 것을 구할 길 없는 코스임이 분명한 죽음의 길로 굳이 병사들을 몰아넣은 그는 먼저 세상을 등진 동료의 살을 발라먹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인육 장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킬까 봐 부하들이 잠든 틈에 몰래 소총들의 공이치기를 빼버리는 모습이다.
총이 격발되지 않으면 영국군을 만나도 교전을 벌일 수 없다. 그런 상태로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은 왜 하는지,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 붕괴를 상징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결국 그는 단둘이 살아남은 최대치와 서로 격투를 벌이고, 최대치의 눈과 그 주변에 큰 상처를 입힌다. 오래된 드라마지만 눈가에 세로로 길게 상처가 난 주인공의 모습을 스틸컷이나 OST 표지에도 썼던 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이 드라마에서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이자 그 캐릭터의 평생을 관통하는 상처(제국주의에 의한)라는 점이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됐기 때문일 것이다(원작 소설에는 도저히 눈알 자체를 고치지 못할 정도로 큰 상처였던 것으로 돼 있지만, 드라마에선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는지 상처만 남기고 시력이 회복된 걸로 묘사).
남의 나라 젊은이의 눈동자에 상처를 낼 정도로 오오에 오장에게 소중했던 일본 제국, 천황이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정작 그렇게 끔찍하게 치른 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지도 못했다. 다만 모든 전시 행위를 보고받고 허락한 히로히토 천황은 책임 추궁에서 비껴갔다. 옥좌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일본의 부흥과 도쿄 올림픽까지 본 그는 평화롭게 황궁에서 숨을 거둔다.
대신증권이 라임펀드를 판매했다 큰 손실을 입었다. 회사에서는 불완전판매로 고객들에게 1000억원이 넘는 배상액을 지불했는데, 이런 경우 책임 소재를 따져 직원들에게 구상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나라 증권업계에서는 통상 불완전판매 책임은 일을 열심히 하다 난 사고로 인식해 구상을 하지 않아왔다.
그런데, 대신증권에서는 대단히 기발한 방법으로 책임 추궁을 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연출했다. 바로 라임펀드 판매 직원들이 입사 당시 가입한 신원보증보험에 보험금을 신청하려 든 것이다. 이 보험은 일하다 낸 사고, 고의로 빚은 불법행위 등을 담보하기 위해 금융사에서 많이 가입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보험금을 청구하면 보증보험은 결코 가만 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증보험에서는 보험금 지급분만큼 문제의 직원들에게 구상을 하게 된다. 12명의 직원이 총 18억원을 구상당할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다. 차압이 붙는 등 경제적으로 사실상 사망상태로 몰리게 돼서다. 더 큰 불안은 작은 보험금까지 알뜰히 챙기는 회사 측이라면 1000억 전액까지는 못 되겠지만 본소송을 통해 직원들이 가진 '전부'를 뜯어내려 할 것이라는 추정에 뿌리를 둔다. 실제로, 오익근 대신증권 사장은 지난 연말 직원들에게 "보험금 청구 외에 본소송도 할 수 있다"는 언질을 줬다(본지 9월 12일 <'이도 저도 아닌' 대신증권 라임펀드 구상권 논란...배임 회피 생색용?> 참조).
다만, 세상 일이 대개 그렇듯 이 사안은 잊혀지는 듯 했다. 대신증권 홍보팀은 통크게도 "보험금 청구는 하지만, 본소송 등 추가적 조치는 하지 않을 것"이란 말을 기자들에게 흘려 일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홍보작업의 이면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불행한 단독 기사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원래부터 본소송은 그러한 오익근發 직원 압박 발언이 나올 무렵에 미세한 차이로 시효완성이 돼 애초 제기할 수도 없었던 상태였음이 본지 취재 결과 밝혀졌다(본지 9월 25일 <[대신증권 구상권 논란 後] ② 청구권 시효 '만료' 후 '소송' 압박...오익근式 배려는 합법적 '직장 내 괴롭힘'?> 참조). 어떻게 시효도 넘긴 소송을 걸겠다고 직원들을 압박할 수 있을까? 당혹스런 상황에 코멘트를 요청받은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는 조직"이라고 탄식했다. 심지어 시효가 완성됐든 안 됐든 이런 사건에서 본소송 운운하는 발언 자체가 나오는 게 이상한 조직이라고까지 그는 비판했다.
그 다음, 또다른 시효 단독의 괴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신원보증보험금을 알뜰히도 받겠다고 신청을 했지만 불성실한 조치로 이후 절차가 반년 넘게 끌탕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원래 SGI서울보증보험 업무 관행상 사건 접수를 반송할 수 있고, 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제대로 절차와 자료준비에 임하도록 요청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보험금 청구서가 반려되면, 또 오묘하게 보험금의 청구시효가 넘어가 버려 보증보험금을 구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본지 9월 26일 <[대신증권 구상권 논란 後] ③ 보증보험도 '시효' 날리나...책임비율 불분명도 문제> 참조). 그럼 왜 보험금 심사 절차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걸까? 보험사는 왜 대신만 은연 중에 봐주는 것일까?
아니, 아예 처음부터 질문이 잘못 됐다.도대체 왜 시효가 완성됐거나 스스로의 책임으로 완성될 상황인데 이런 이상한 본소송이며 보험금 청구 등을 악착같이 착수하거나 착수하겠다고 직원들을 후벼판 것일까? 피눈물 외에 무슨 득이 회사에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그저 짐작엔 언젠가 발행어음이나 초대형 IB를 하고 싶어서 내부통제 강화 레코드를 쌓는 것 아닐까 여길 뿐이다.
'오익근 사장 체제'는 직원들의 이런 희생 위에 운영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오너 3세인 양홍석 대신파이낸셜그룹 부회장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라고들 한다. 아마, 오 사장이 그간 과시해 온 능력을 보면 양 부회장의 승계 구도 굳히기는 마음먹은 계획 구상 이상으로 탄탄히 잘 진행될 것이다. 정글에서 남의 눈동자를 후벼파다 역공당해 죽은 오오에 같은 모습이 아니라, 히로히토의 치세 말기 같은 평화로운 번영상이 명동 대신 신사옥엔 허락될 것이다.
다만, 대신의 故 양재봉 창업주는 금융사고로 회사가 흔들리자 스스로 책임을 떠안고 떠났다 다시 직원들의 간청으로 복귀해 경영을 이어간 이력이 있다는 점을 거론하고 싶다. 같은 금융사고인데, 시효 논란들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조차 직장 내 괴롭힘을 이어가는 오 사장이나 그런 효과로 경영권을 강화해 가는 '손자 양홍석'과는 거리가 있는 미담이다. 이런 식으로 직원들을 후벼파는 행동은 사기를 떨어뜨려 영업 전쟁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아군 총에서 격발장치를 빼고 돌격만을 외치던 오오에 오장의 모습에 오 사장이 겹친다.
마침 오늘은 추석이다. 송편이나 먹고 있는지 라임펀드 판매 직원들에게 가정방문이라도 해 보면, 차압딱지를 조용히 떼주는 모습을 보이면 어떨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