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은 삶의 기준이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경계선이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가지런히 놓여 있던 삶의 균형은 무너지고 나비효과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선을 넘어서도, 멈추지 않는다면 모든 관계는 불행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나와 당신의 '선(線)'을 지켜줄 '선(善)'한 대화 기술>(손민호 지음·채륜 펴냄)에서도 선(善)한 언어는 선한 관계를 만드는 척도로 봤다. 언어는 인간의 세 가지 악(惡)인 '악덕·무지·무료'에서 벗어나게 한다. 말을 할수록 악독해지고 아는 것이 없어지고 주변 사람들을 지루하게 한다면 그 말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이란 소리를 듣는다. 선한 언어는 선(線)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발현된다. 그런데 LG가(家) 상속 분쟁 소송이 이제 넘지 말아야 할 선(線)까지 넘는 모양새다.

LG가(家) 고(故) 구본무 선대 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와 두 딸(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씨) 등 세 모녀 측이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상속 분쟁 소송에서 말이다.

이달 16일 서울서부지법 민사11부(박태일 부장판사)는 세 모녀 측이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상속회복청구 소송의 두 번째 변론기일이 진행됐다. 지난달 첫 변론기일에 이어 하범종 (주)LG 경영지원부문장(사장)에 대한 증인신문을 재개했다.

이번 2차 변론기일에서는 지난해 김영식 여사를 포함한 세 모녀 측이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상대로 상속 분할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가족 간 대화를 녹음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녹취록을 보면 원고 측이 오히려 기존에 3차에 걸쳐 이뤄진 상속 합의를 번복했다는 것이 구광모 회장 측의 주장이다.

구광모 회장(피고) 측 변호인은 추가 심문을 위해 증인으로 출석한 하 사장에게 녹취록을 토대로 "구연경 대표가 '아빠(구 선대회장)의 유지와 상관없이 분할 합의는 리셋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고 하 사장은 이런 대화가 있었다고 확인했다.

녹취록에는 구본무 선대회장의 부인인 김영식 여사가 구광모 회장에게 "내가 주식을 확실히 준다고 했다"고 말하며 사실상 가족 간 합의를 인정하는 장면도 나오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김 여사가 "구연경 대표가 잘 할 수 있다. 경영권 참여를 위해 지분을 다시 받고 싶다"고 말한 사실도 녹취록을 통해 공개됐다. 이는 세 모녀 측이 소송 제기 당시 "경영권 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힌 것과 배치되는 대목이다.

이런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2차 변론기일의 법정 공방에서는 가족으로서 최소한 '꼭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한' 느낌이다. 세 모녀 측은 이날 재판에서 구본무 선대회장이 생전에 사용했던 '금고'를 물고 늘어졌다. 

세 모녀 측 변호인은 "구본무 선대회장 별세 직후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과 하범종 사장이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고인의 사무실과 별장에 있던 금고 문을 열었다"고 주장하면서 "직계 가족(세 모녀)에게도 알리지 않고 금고를 연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하 사장은 "곤지암 별장은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 영빈관 개념"이라며 "해외에서 회장들이 오거나 중요한 대화를 위해 필요한 공간으로, 그 공간 자체가 회사의 자산이고 그 안에 있는 금고도 회사 자산"이라고 말했다. 이어 "금고 안에는 별것이 없었다. 개인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어 재판장께 따로 말씀드리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세 모녀 측 변호인은 하 사장의 거듭된 프라이버시 문제라는 말에는 아랑 곳 하지 않고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판사까지 나서 "망인의 프라이버시 문제일 수 도 있다"고 세 모녀 측 변호인에 주의를 준 뒤 "공개된 법정에 답변을 할 사항인지"라고 반문했다.

김영식 한국유네스코협회연맹 총재 [한국유네스코협회연맹 홈페이지 캡쳐]
김영식 한국유네스코협회연맹 총재 [한국유네스코협회연맹 홈페이지 캡쳐]

구본무 선대회장은 살아 생전에도 돌아가신 후에도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으로 꼽힌다. 생전 과한 의전과 복잡한 격식을 멀리하고 소탈하게 살아온 구본무 선대회장은 가는 길 마저도 3일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렀다. "남들에게 폐 끼치지 말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조화와 외부인 조문도 정중히 사양하고 평소 구본무 선대회장이 즐겨 찾던 화담숲 인근에 수목장으로 영면들면서 큰 울림을 줬다.

이런 구본무 선대회장이 죽은 뒤 가족 상속 분쟁의 법정에 소환됐으니 저세상에서 얼마나 통탄해 하실까.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하 사장을 상대로 진행된 질문은 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김 여사의 시아버지이자 구연경·연수 자매의 친할버지인 고(故) 구자경 명예회장과 관련한 질문에서다.

세 모녀 측 변호인은 하 사장에게 "증인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뜻이라고 하는데 2008년 2009년에는 치매가 발병돼 의사소통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거 아니냐. 언제부터 의사소통이 안됐냐"고 반문했다. 이에 하 사장은 "지난 2015년도 아니고 2016년 또는 2017년으로(기억한다)"라고 답했다.

세 모녀 측 변호인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언제 어떻게 자기 지분을 전부 피고(구광모 회장)에게 이전하라고 언제쯤 의사를 밝혔냐"며 "(구자경 명예회장이) 2016년과 2017년에는 치매 상태로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했다고 하고 2018년에는 구본무 회장이 돌아가셨는데 구광모 회장에게 이전해라 말씀을 언제 하셨냐는 것"이라고 물었다.

이에 하 사장은 "내 지분을 구광모에게 다 이전하라 그런 말씀보다 구광모가 장차 회장이 되야 한다. 충분한 지분을 가져야 한다. 내 지분은 장자한테 가야 한다는 취지로 늘 말했다"며 "돌아가신 후에 구광모에게 돌아가는 걸로 다른 자녀들도 아무 반발 없이 합의했고 구자경 회장의 오랜 뜻이 관철된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세 모녀 측 변호인이 구자경 명예회장의 치매까지 꺼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구자경 명예회장은 1925년생이다. 2019년 12월  향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치매는 나이가 들면 피할 수 없는 질병 중 하나이다. 그런데 생전에 잘알려지지 않았던 구자경 명예회장의 치매까지 들먹인 행위는 상속 분쟁 소송을 떠나 가족 간의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선(線)까지 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1대 회장부터 2대 구자경 회장 그리고 3대 구본무 회장까지 장자 승계 원칙은 그룹의 가풍이자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처럼 여겨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 전통이 LG가(家) 모두 동의를 했던 것이고 존중했던 것이다. 

김영식 여사는 LG그룹의 2대 회장인 구자경 명예회장을 시아버지로 모셨고 3대인 남편 구본무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 받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다. 지난 변론기일에서 '구자경 명예회장의 ㈜LG 주식을 모두 구광모 대표가 상속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문서도 있었고 여기에 김영식 여사의 서명이 담긴 것도 그런 의미로 해석된다.

LG가(家) 상속 분쟁 소송이 막장드라마 보다 더 막장 같은 끝을 보여주기 전에 이제 끝내야 할 때다. 세 모녀가 소송을 멈추고 다시 인화의 LG로 돌아올 수 있도록 LG가(家) 어른들이 나서야 할 시점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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