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하춘화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1955년생으로 올해 나이 예순 다섯살인 하춘화는 전라남도 영암에서 4녀 중 2녀로 출생한 후 부산에서 잠시 동안 유년기를 보내다가, 전라남도 광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한 천부적인 꼬마 가수였다.

어릴 적부터 워낙 노래를 잘 하기로 그 명성이 자자하여서 하춘화의 노래실력을 일찍이 알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하춘화를 가요계에 입문시켰다. 그리하여 하춘화는 1961년 만 6세에 8개월 동안 서울 동아예술학원 가요과를 수료한 이후 데뷔곡 '효녀 심청 되오리다'(오종하 작사/형석기 작곡)가 수록된 레코드를 취입했다.

1961년 동화예술학원에서 정식 음악 공부를 시작한 하춘화는 기타 치는 8살 김영환,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9살 정선과 함께 ‘학원의 3대 영재’로 통했다. ‘하춘화와 삼남매’ 그룹을 결성한 이들의 첫 무대는 서울 종로4가의 천일극장이었다.

하춘화는 17세가 되던 1971년에 정규 1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해 정식 가수가 되었다. 1집 음반의 타이틀곡이였던 정통 트로트 '물새 한마리'(이용일 작사/ 고봉산 작곡) 가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 성인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가요계를 이끌게 되었다.

1972년 가수 겸 작곡가였던 고봉산과 신민요 '잘했군 잘했어'(원작: 이고범/ 개작: 반야월/ 작곡: 고봉산)를 듀엣으로 불러 TBC 동양방송에서 여자가수상을 4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불과 18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톱 가수로 성장했다.

그 해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만들어 아리랑의 맥을 이어나간 신민요 '영암 아리랑'(작사: 백암/ 작곡: 고봉산)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 김, 김상희, ,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성 가수로 발돋움 했다.

1974년부터 자신만의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에 영화 '숙녀 초년생'에서 남진과 함께 주연으로 열연하여 영화계에도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11월 11일에 이리역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어 약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 중에 하춘화와 이주일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한동안 가수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故 이주일은 당시 부상당한 하춘화를 구한 사실이 알려지면 무명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1979년 3월 27일에 하춘화는 경남대에서의 학업과 결혼 준비로 인하여 은퇴를 선언한 후 학업에 열중하던 하춘화는 은퇴 선언 2년 만인 1981년에 가수로 복귀했다.

1,500회가 넘는 공연 기록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된 하춘화의 데뷔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어린이 가수 장르라는 새 이정표를 제시했다. 2000년 데뷔 40주년을 맞은 하춘화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자신의 히트곡을 2장에 담은 기념 CD를 발매했다.

2011년에는 데뷔 50주년을 맞아《하춘화와 함께하는 콘서트》를 개최하였으며, 이 콘서트에서 벌어들인 200억원을 불우이웃 돕기에 기부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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