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모 LG그룹 회장. [블록체인밸리 DB]](https://cdn.financialpost.co.kr/news/photo/202311/172941_149334_1038.jpg)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1대 회장부터 2대 구자경 회장 그리고 3대 구본무 회장까지 장자 승계 원칙은 그룹의 가풍이자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처럼 여겨왔다. 장자 승계를 유지하면서도 단 한 차례의 분쟁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계열분리를 통해 총수에 오른 조카에게 힘을 실어줬다.
LG그룹은 지난 1969년 구인회 창업주가 별세한 뒤 이듬해인 1970년에 장남인 구자경 2대 회장이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으면서 장자 승계 원칙이 시작됐다. 구자경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받자 구 창업주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사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1999년 구철회 사장 자녀들은 LIG(당시 LG화재)그룹으로 계열 분리했다. 구 창업주의 다른 동생들인 구태회(셋째 동생)·구평회(넷째 동생)·구두회 회장(다섯째 동생)은 2003년 LG전선(현 LS전선), 극동도시가스(현 예스코), LG칼텍스가스(현 E1), LG니꼬동제련(현 LS MnM) 등을 떼어 계열 분리했다. 이들 기업들은 2005년 LS그룹으로 다시 뭉쳤다.
지난 1995년 구자경 회장 역시 장자 승계 원칙을 세우며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줬다. LG반도체를 이끌던 구 창업주의 3남 구자학 회장과 유통 사업을 담당하던 4남 구자두 회장 등은 LG그룹 경영에서 일제히 퇴진했다. 조카인 구본무 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5년 전 LG그룹 4대 회장에 취임한 구광모 회장 역시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지난 2018년 구본무 회장 별세 후 당시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이 한시적으로 그룹 회장에 오를 것이란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구본준 회장도 LX그룹으로 분리해 독립하면서 구광모 회장의 부담을 덜어줬다. 구본준 회장 역시 LG가(家)의 장자 승계 원칙을 당연히 선대회장의 유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사촌 경영'의 전통을 이어가는 LS그룹을 보자. 장자 승계 원칙을 지키면서 잡음 없이 아름다운 경영권 승계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1월 구자은 회장이 구자열 회장의 뒤를 이어 LS그룹 3기 체제의 시작을 선언했다. LS그룹은 구 창업주의 셋째·넷째·다섯째 동생인 고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 구평회 E1 명예회장,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 등 3형제가 그룹의 창업 1세대이다. 3형제는 그룹을 공동으로 경영하면서 회장직은 각자의 장자가 돌아가며 맡기로 약속했고 실천하고 있다.
초대 LS그룹 회장에 구자홍 회장(2004∼2012년)이 맡은데 이어 2대 회장에는 구자열 회장(2013∼2021년)이 각각 9년씩 그룹 회장을 역임했고 구자은 회장이 이어받으면서 LS그룹 3기 체제가 막이 올랐다. 구자은 회장은 구두회 회장의 외아들이다. LS그룹 2세 경영의 마지막 주자이다.
하물며 범 LG가(家)인 LS그룹도 사촌 경영의 전통을 세우고 있는데 장자 승계 원칙을 이어온 LG그룹이 구광모 회장인 4대째에서 생채기가 났으니 낮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구본무 선대 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와 두 딸인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와 구연수씨 등 세 모녀 측이 장자인 구광모 회장을 상대로 지난 2월 28일 서부지법에 '상속 재산을 다시 분할하자'며 상속회복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다.
지난달 5일 소송을 제기한 세 모녀 측의 첫 변론기일이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11부(부장판사 박태일)에서 열렸다. 이날 재판에서는 상속 실무를 총괄한 하범종 LG 경영지원부문장(사장)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됐다. 하 사장은 자신이 2017년 4월 구 전 회장의 유언을 직접 들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구본무 선대 회장은 2017년 악성 뇌종양으로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뒤 이듬해 별세했다. 하 사장에 따르면 구본무 선대 회장이 첫 수술 전 증인을 병원으로 불러 '구광모 회장에게 지분을 모두 상속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하 사장은 "(구본무 선대 회장께서) '회장은 구광모가 해야 하고 지분이 부족하다. 앞으로 구광모 회장이 많은 지분을 가지게 하라'며 경영 재산 전체를 넘기는 걸로 말씀 주셨다"고 증언했다. 또 "그 내용을 A4용지 한 장 분량으로 정리해 다음 날 선대회장의 자필서명을 받았고 추후 상속 협의 과정에서 이 메모가 참고자료로 활용됐다"고 덧붙였다. 하 사장은 증언 내내 해당 문서를 유언장이 아닌 '승계 문서'라고 지칭했다.
이 메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넷이라고 했다. 여기서 넷은 하 사장을 포함해서 김영식 여사와 두 딸인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와 구연수씨 등 세 모녀이다.
하 사장의 증언 내용에서도 처음에는 전체 지분이 구광모 회장에게 가는 것에 동의했다가 김영식 여사가 '딸들이 주식을 한 주도 못 받는 게 서운하다'고 했다고 한다. 하 사장이 다시 구광모 회장에게 요청해 기존 보유지분(6.24%)과 선대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11.28%를 합친 (주)LG 지분 17.52% 중 15%를 넘어서는 2.52%를 자매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이에 모친인 김 여사는 지분을 상속받지 않았지만 여동생인 구연경 대표와 구연수씨는 각각 ㈜LG 지분 2.01%(3300억원), 0.51%(830억원)를 상속 받았다. 세 모녀는 지분 외에 구본무 회장의 개인 재산인 금융투자상품, 부동산, 미술품 등을 포함해 5000억원 규모의 유산도 상속받았다.
이를 차치하더라도 LG가(家)는 장자 승계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재계에서 드물게 분쟁이 없이 이어지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받는 기업으로 추앙됐다. 백번 양보해서 세 모녀 측이 일정 부분 승소를 하더라도 누구를 위한 승자인지 묻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세 모녀 측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마음으로 꼬인 실타래를 한시라도 빨리 풀기를 바랄뿐이다. 국민기업의 이미지가 더 이상 볼썽사나운 상속분쟁으로 실추되는 일이 안생겼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김 여사는 최근 한국유네스코협회연맹 회장에 취임했다. <유네스크 헌장>에 있는 유네스코 창설 목적을 보면, "헌장의 당사국들은 세계 국민들 사이의 교육적, 과학적, 문화적 관계를 통하여 국제연합의 설립 목적이며 또한 국제연합 헌장이 선언하고 있는 세계 평화와 인류 공동의 복리라는 목적을 촉진하기 위하여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를 창설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유네스코의 총재 자리를 맡고 있는 김 여사는 세계의 평화에 앞서 가정의 평화를 먼저 챙겨야 하지 않을까.
